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태도 변화 === 이 무렵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인 편이었으나, 공민왕 말기로 갈수록 점점 틈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제32대 [[우왕]] 시기에 정점을 찍었는데, 명나라 사신이었던 채빈(蔡斌)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1374년 공민왕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홍무제는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당시 고려의 실력자였던 [[이인임]](李仁任)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도록 했고, 그 주범인 [[김의(명나라)|김의]](金義) 등은 북원으로 달아났다. 이인임을 비롯한 고려 지도층의 인식은 다음의 언급을 통해 나타난다. >자고로 나라의 임금이 시해를 당하면 재상 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그 죄를 받는 법입니다. 황제가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공이 필시 모면하지 못할 터이니, 원나라와 화친해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이인임 열전>}}} 비교적 친명 정책을 표방하던 공민왕의 시해, 명나라 사신 채빈 살해 등은 홍무제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했고, 이후 명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강경 정책으로 나아가게 된다. 명나라는 고려의 재정에 직접적인 부담이 될 정도로 막대한 조공[* 해마다 말 1,000여 필, 금 100근, 은 10,000냥, 우량마 100필, 포목 10,000필 등]을 요구하며 외교적 압박을 가했는데, 일반적으로 조공의 수량은 호부(戶部)에서 요구하면 예부(禮部)가 제시를 하는 것이었지만, 이때 고려에 대한 조공 수량의 책정은 홍무제가 예부에 명령하여 일방적으로 책정한 것으로서 당시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매우 많은 수치였다. 그런데 막상 홍무제의 우려대로 북원과 고려의 관계가 가까워지자(혹은 가까워지는 듯 보이자) 상황은 또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375년의 군사적 시도가 실패한 이후 나하추는 고려와의 연합 작전을 통한 전세 회복을 꿈꾸며 지속적으로 고려와의 연락을 시도했다. 당시 몽골의 북원, 요동의 나하추, 한반도의 고려가 서로 가진 사신 왕래는 다음과 같다. ||'''시기''' ||'''파견 세력''' ||'''비고''' || ||1375년 1월||나하추||우왕 계승의 사유를 물어옴|| ||1375년 5월||북원||북원 사신을 강계(江界)에서 대접|| ||1376년 2월||고려(李原實)||나하추 방문|| ||1376년 5월||북원(吳抄兒志)||우왕이 융숭히 대접함|| ||<|4>1376년 10월||북원(부케테무르)||[[코케 테무르|코케테무르]]의 회유문 전달|| ||나하추(九住)||문천식(文天式)을 돌려보냄|| ||고려(孫彦)||북원에 우왕 책봉 요청서를 보냄|| ||고려(黃淑卿)||나하추의 구주 예방에 답례, 우왕 책봉 승인|| ||1376년 12월||<|2>나하추||<|2>은과 양을 선물함|| ||1377년 1월|| ||<|3>1377년 2월||북원(보라디)||우왕 책봉 명령서, 술과 해동청을 선물함|| ||나하추(문카라부카)|| - || ||북원(豆亇達)||북원의 연호 '선광'(宣光) 사용|| ||<|2>1377년 3월||고려(李子松)||우왕 책봉에 대한 답례|| ||고려(문천식)||나하추, 옹주(翁主) 문카라부카, 두마대 등에게 녹봉포(祿俸布) 제공|| ||1377년 7월||북원(체릭테무르)||고려에게 정료위(定遼衛) 공격을 요청함|| ||<|2>1377년 9월||북원||재차 정료위 공격 요청|| ||고려(문천식)||기후, 말과 풀 등의 부족으로 출사할 수 없음을 통보|| ||1377년 11월||고려(황숙경)||동지 명절 축하|| ||1377년 12월||나하추||양 160두와 모우(毛牛) 3두 선물|| ||1378년 7월||<|2>북원||[[천원제]] 테구스테무르의 즉위를 알림|| ||<|2>1379년 6월||연호를 '천원'(天元)으로 개칭했음을 알림|| ||나하추(문카라부카)||우왕은 나하추와의 특별한 우의를 표시하고, 저포와 마포 각 150필을 선물함|| ||1379년 12월||나하추||매와 양을 선물함|| ||1380년 1월||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북원의 조서를 가지고 옴|| ||1380년 2월||북원(시례문·대도려)||우왕을 태위(太尉)에 임명|| ||1383년 1월||나가추(문카라부카)||우호 재개 요청|| ||<-3>'''[[http://i.imgur.com/7hxTgFS.jpg|출]][[http://i.imgur.com/cdpGfmH.jpg|처]]'''|| 표에서 확인 가능하듯 1375년을 전후로 하여 북원 - 나하추 - 고려 간 사신 왕래는 상당히 빈번한 편이었다. 고려는 우왕의 책봉 문제 해결 등을 위해, 북원이나 나하추는 고려와의 군사적 연대 등을 위해 서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하추는 고려의 가장 당면한 문제였던 우왕의 책봉 문제 등을 해결해 주었으며, 이를 통한 대가로 고려의 군사 동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는 강경 정책에서 다시 유화책을 쓰기 시작한다. 아직 북원의 세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고려와 몽골 세력의 연대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고, 만일 나하추나 북원을 공격하려 한다고 해도 고려가 방해가 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1377년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던 고려인 358명 등을 풀어주며 명 태조는 고려에 손을 내밀었다. 이후에도 공물의 증액에 관한 대립은 있었으나, 1380년 8월 고려 조정의 요구가 일부 수용되어 이것도 부분적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렇게 공민왕 사후 틈이 벌어졌던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겨우 접점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역시 오래 가진 않았다. 몽골 세력이 괴멸(壞滅)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